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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손원일 선교재단

   손원일 제독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장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손정도 목사)

 

“삼가 이 몸을 나라에 바치나이다.”(손원일 제독)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해군, 해병대와 군종목사 제도는 바로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장로(제독, 1909∼80년)로부터 기인한다. 1948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 해병과 대한민국 군종(군목) 제도를 창설했다. 믿음의 군대, 신사해군을 만들기 위해 1945년 11월 11일 (士 士) 창설했으며 군종제도가 마련되기 이전 이화여대 교목이었던 정달빈 목사를 중위로 임관시켜 창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손원일 제독은 1909년 평남 증산면에서 손정도(1872∼1931)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정도 목사는 정동 제일감리교회 담임을 지냈으며 목회와 독립투쟁을 병행했던 인물이었다. 유관순 열사가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던 시절 담임이 바로 손정도 목사였다. 이후 일찌기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한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이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 

 

손 목사는 나라를 빼앗긴 뒤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에 영향을 받아 손원일 제독은 중국 중앙대에서 해양학을 전공하고 일찍부터 외국을 항해하는 배에 승선하였으며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돕다 만주와 조국땅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과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 되자 바다를 지키는 해군이 되기로 결심한다. 

 

손 제독은 해방 직후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했고, 6·25전쟁 때는 해병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등 국난 극복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6.25 당시, 소련의 막강한 지원을 받았던 북은 한국 해군이 군함도 없고 장비가 빈약한 것을 파악하고 3.8선 뿐 아니라 후방 부산을 일거에 점령하기 위해 1천톤급 배에 600여 명에 달하는 특수부대를 태워 38선과 바다에서 수륙양면전을 편다. 하지만 이때 우리나라에는 작은 군함 한척이 있었다. 바로 겨우(?) 450톤 급의 해군 최초 군함 백두산함이였다. 이 배는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이 1949년 6월 군함 구입을 위해 참모총장부터 말단 수병까지 월급의 10%를 모금하고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이 빨래나 바느질 삯으로 모금운동에 보태고,병사들도 고철을 모아 돈을 더했다. 장교 월급이 겨우 쌀 한말 가격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손 제독은 최초의 군함 구입을 위해 자신의 사비를 기꺼이 털었다. 이렇게 성금으로 사들인 이 중고 군함은 6.25때 부산의 턱밑까지 침투해 내려오던 북의 군함을 극적으로 침몰시켜 우리 조국을 지킨 소중한 함정이 었으며 임진왜란시 이순신 제독과 수군이 있었다면 6.25때는 손원일 제독과 손제독이 창설한 해군, 해병대가 있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도우심이었다. 이후, 손 제독은 6.25 전후 복구기에는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국군의 날, 현충일 제정, 동작동 국립현충원 및 국방대학교 건립 등 군 현대화에 앞장섰다. 그리고 초대 서독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적으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같은 나라사랑 정신은 오늘날 용맹하고 멋진 해군, 해경, 해병 뿐 아니라 육군, 공군을 포함한 모든 대한민국국군의 조국 수호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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