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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손원일 선교재단

   홍은혜 권사

홍은혜 권사 해군의 어머니 홍은혜 권사

 

 

 

홍은혜 권사는 한국해군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의 부인으로 현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청년 손원일과 결혼한 후 70년 세월을 해군을 위해 살아온 해군의 전설이다.

 

남편인 손원일은 1908년생으로 1930년 상하이 국립중앙대 항해과를 졸업하고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해방병단(海防兵團 marine defense group)을 창설하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해군의 효시였다. 이어서 1946년에는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손원일은 당시 중령으로 초대 교장에 취임하고 1949년에 한국 해병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렇듯 손 제독은 해군과 해병대를 창설한 주역이다. 창설 후 한국해군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36척의 선박을 인수해 함대를 꾸렸지만 모두가 노후한 소형선박들이었으며 전투함은 한 척도 없었다. 이때부터 전투함을 갖기 위한 손제독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대한민국은 너무나 초라한 나라였기에 전투함 구입을 위한 예산염출이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손 제독은 모금운동을 시작했고 장병들도 월급의 10%씩을 떼서 모았고 홍은혜 권사는 해군부인들과 함께 삯바느질을 하여 모금에 동참하여 그렇게 해서 모은 15,000달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이면서 전투함을 구입하겠다고 했고, 이 대통령도 금일봉을 보태면서 꼭 그렇게 하자고 격려했다.

 

그렇게 하여 1949년 미국의 대학교에서 실습선으로 사용되다가 폐선되기 직전이었던 600톤급 구식 함정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손 제독은 이 함정에 3인치 포를 장착한 뒤 ‘백두산함’이라 명명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1950년 4월 10월 태극기를 단 백두산함이 태평양을 가로 질러 진해항에 들어왔을 때 해군장병들은 첫 전투함을 가졌다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두달 후 백두산함은 나라를 구하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북한군이 전면남침을 개시한 1950년 6월 25일의 밤 9시 후방침투 병력 600명을 싣고 부산으로 향하던 북한의 무장수송선을 대한해협에서 발견하고 필살의 전투 끝에 격침한 것이다. 전쟁 발발 한달 만에 낙동강 이남의 영남지역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전 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만약 백두산함이 북한군의 후방침투를 막지 못했다면 6.25 전쟁의 전개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홍은혜 권사는 손원일 제독과 함께 고스란히 한국해군의 눈물겨웠던 시절을 살아온 산 증인이자 스스로 해군의 일원이었다. 홍 권사는 남편이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장이던 시절 사관생도와 해군장병들이 구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 크게 낙담했다. 당시 해군은 제대로 만든 군가가 없어 일본군이 부르던 노래에 한국어 가사를 붙여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를 잘 쳤고 음악에 소질이 많았던 홍 권사는 스스로 해군이 부를 노래들을 작사 작곡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홍 권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군가들은 오늘날까지 해군장병들에 의해 애창되고 있다.

홍은혜 권사는 초급장교들을 위한 신앙공동체인 ‘원일다락방’을 진해에 건립하여 인격과 실력과 신앙을 갖춘 Good Christian Officer를 양성해 왔으며 신사임당 상도 받았다. 남편인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 초대 서독대사 등을 역임한 후 1980년 향년 71세로 생을 마감하고 서울 국립현충원에 묻혔으며, 홍 권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해군장병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해군의 어머니로 살다가 100세의 나이로 손제독 곁으로 갔으며 2019년 6.25 공로자 2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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